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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건축 동네안테나

건축을 사랑했던 선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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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건축을 사랑했던 선배가...

 


 

건축의 현실

건축을 공부하면서, 건축의 어려운 현실에 대한 선배들의 이야기는 듣는다. 하지만, 건축의 매력에 푸욱 빠져버린 학생들은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해낼 수 있다고 자신하며 졸업 후 설계사무소로 향한다. 그러나 실무에서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생각보다 너무 가혹하다.
처음 계약하는 평균 연봉이 1000 만원, 월 100만원이 안 되는 월급에 한숨이 나온다. 그래도 이미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고 선택한 길이다. 나에겐 꿈이 있다는 것을 상기하며, 나중에는 사정이 나아지리라 기대하며 참는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 2년이 지나도, 월급은 10, 20만원 정도나 올라갈 뿐이다.
당장의 경제적인 만족은 포기하고 미래의 꿈을 보고 일에 전념하기로 한다. 하지만, 실무에서의 일은 학교에서 배운 건축과는 너무나 다르다. 좀 더 인간을 위한 공간과 멋진 디자인보다는 경제성과 법률적 지식을 배운다. 매일 모니터 앞에서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재미없는 설계도면을 수정한다. 거의 매일 야근하며 지루한 일상을 보낸다. 점점 모니터를 바라보는 눈은 동태눈깔처럼 침침해지고 머리 속은 비어가고 일은 재미없어 진다. 간혹 재미있는 기본 디자인 설계를 할 기회를 갖는다. 현실과 타협한다고 해서 디자인을 완성했다. 그러나 현상설계에 떨어지거나 건축주가 거부하여 그 동안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현실에서의 어려움이 싫어서 유학을 가기로 했다. 건축 유학은 장학금도 없고 유명 대학일수록 더 비쌌다. 충분치 못한 가정형편에 무리해서 자금을 마련했다. 영어공부도 열심히 했고 포트폴리오도 정성스레 만들었다. 다행히 미국의 꽤 유명한 건축 대학원에 입학하여 공부하게 되었다. 3년여 동안 정말 열심히 건축을 공부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제 국내에 들어가 실무 경력 몇 년을 쌓고 사무소를 개업하여 유명한 건축가가 되면 다 되리라 믿었다. 국내에 들어와 대형 설계사무소에 들어갔다. 그래도 좀은 기대했건만, 너무나 봉급은 짜다. 세상의 어느 분야에서 이름만 들어도 아는 외국 유명 대학의 석사학위 취득자가 2000대 초반 연봉을 받고 일하고 있는가? 그래도 여지껏 들인 그 많은 돈과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열심히 일했다. 일에 치이느라 아직까지 장가도 못 갔다. 친구 놈들은 이미 대기업 과장급에 집도 마련하고 애들도 유치원에 다닌다. 늙어버리신 부모님께 돈 타서 유학까지 갔다오느라 효도 한번 제대로 못해드렸다.
이제 드디어 독립하여 내 이름으로 사무실을 개업했다. 직원도 손수 뽑았다. 사무실을 개업하는 날 내 꿈이 이루어지는 듯 너무나 좋았다. 하지만 잠시동안 이었다. 당장 일거리가 없었다. 일거리를 구할 곳이 막막했다. 예전에 아는 건축주들에게 전화도 하고 인사도 하여 간간히 작은 일거리를 얻었다. 하지만, 사무실을 운영해나갈 만한 자금이 되지 않았다. 자금난을 탈출하려면 큰 프로젝트를 해야했다. 커다란 프로젝트 현상설계에 도전했다. 정말 잘 된 것 같았고 완벽해 보였다. 그러나 떨어졌다. 그 이유인즉, 로비가 부족했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어릴 때의 순수한 생각 만을 갖고 있어서는 안되었다. 사람도 많이 만나고 영업활동도 활발히 하고 감리도 하고 공사도 직접 맡아야 했다. 내가 원했던 건축이 아니더라도 돈이 되면 우선 좋았다. 처음에는 내가 하는 프로젝트에서 10여개 중에 1개정도만 ‘작품’ 다운 건축을 하면 되지 않을까 했다. 그러나 점점 평생에 한번만이라도 내가 진정 원하는 ‘작품’다운 건축을 하면 되지 않을까 한다.
늦은 만큼 늙으신 부모님께 효도도 해야하고 뒤늦게 가지게 된 가정을 꾸려 나갈려면 나의 꿈은 뒤로 접어 놓아야 했다. 우선은 건축주 입맛에 맞는 ‘집장사’라도 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건축’을 하는 꿈은 내가 향후 대가가 된 이후로 접어 둔다. 건축을 처음 접할 때부터 계속 잡히지 않는 마음 속의 파랑새를 쫓고 있을 뿐이다.




건축의 본질

건축이란 무엇인가? 흔히 건축과 면접에서 묻는 질문이다. 이에 대하여 정답은 없다. 건축이란 것의 의미는 이를 보는 시각에 따라 너무나 다양해서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건축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과 환경을 디자인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서 보다 재미있고 멋진 공간을, 인간의 삶을 가치있게 해주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자신들의 직업에 자부심을 느낀다. 하지만, 이는 건축가들의 건축일 뿐이다.
건축의 의미와 역할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건축사에 등장하는 역사 속의 교회, 궁궐 등을 보고 건축을 배우게 된다. 역사 속의 건축은 일반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과 환경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대 시대에 와서 일반인들에게 건축이 갑자기 가까워졌다. 누구든 돈만 있으면 건축가를 고용하여 ‘건축’이라는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일반인의 조그만 주택이 ‘건축’의 대상물에 속하게 되었다.
이는 건축이란 것이 사회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건축이 지금처럼 대중성과 공공성을 지향하게 된 것은 근대 이후에 들어와서 였다. 또한 대중성과 공공성이란 위선의 가면 속에는 경제적인 논리에 의한 건축이 전제되어 있다. 신분에 상관없이 돈이 있는 자는 누구든 ‘건축’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공공성이란 이름으로 건축은 권력과 자본을 포장하는 도구가 되었다. 건축은 이제 권력의 시녀가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되었다. 수없이 많은 건물이 대량으로 필요했고 건축가는 대량으로 양산되었다. 건축은 과거의 낭만적 건축과 변해버린 현실사이에서 사회적 지위와 입지를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었다. 온갖 노력을 다해 작품 건축을 만들어도 누구 하나 알아주지 못하고 경제성 없다고 외면당하기 일쑤이다. 설사 이를 짓게 되어도 그냥 껍데기만 있는 집보다 많은 돈을 받는 것도 아니다. 더 이상 창조적인 디자인이 필요치 않고 유명 외국 잡지에서 카피만 해오면 된다. 온갖 화려한 장식과 조명으로 얼룩진 상업적 건물은 건축가들이 추구하는 ‘작품’을 원하지 않는다. 자신의 철학을 가지고 부단한 노력한 건축가가 작가로서 인정을 받기보다, 유행에 민감하고 영업 능력 뛰어난 얍씰한 건축가가 유명해지고 ‘건축가’로 이름나기가 더 쉽다.
건축의 본질이 의심되는 시대이다. 이에 대해 답은 없으면서도, 사회적으로 학문적, 직업적 위치를 제대로 잡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건축이 답답해 보이는 안타까움은 어쩔 수가 없다.




건축의 경제적 현실

건축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가 학문과 현실과의 커다란 차이라고 보인다. 학교에서 정말 흥미를 가지고 열심히 건축 공부에 몰두해 오던 학생들은 졸업 후 실무에서 한번쯤 좌절하게 된다. 건축에서의 사회초년생들에게 가장 한숨이 나오게 하는 것이 건축에서의 경제적 현실이다.
명문대 건축과를 졸업한 후 건축가의 꿈을 가지고 유명 건축가의 설계사무소에 들어가 처음 받는 월급은 한달 7~80여만원, 평균 초봉 1000 만원. 건축을 모르는 일반인들이나 건축을 공부하려는 학생들, 이제 막 건축을 공부한지 얼마 안 된 어린 학생들은 전혀 상상도 못할 보수이다. 일반인들은 ‘에이, 설마’ 하고 웃는다. 일반적인 샐러리맨들보다 노동시간은 배나 많으면서, 그 보수는 절반 수준이다. 거의 매일 계속되는 야근과 박봉은 개인적인 여가를 거의 허용하지 않는다.
큰 설계사무소에 들어갈 경우 보수 수준은 조금 낫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평균적인 박봉보다 낫다는 것이지 절대적인 수치로는 형편없는 것이 사실이다. 평범한 중소기업 월급 수준에도 훨씬 못 미친다.
혹자들은 거금을 들여 유학을 간다. 보통 유학을 가려면 기본적으로 억대의 돈과 최소 2~3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국내에서 일반적으로 인정을 많이 받는 미국의 유명 건축 대학원 들은 장학금도 없으면서 학비는 무지하게 비싸다. 짧게 잡아 2~3년 죽도록 고생할 각오를 가지고 1억이상의 부모님 돈을 축낼 생각을 가지고 미국이나 일본으로 뜬다. 프랑스 등 유럽 유학은 그에 비하면 학비가 거의 들지 않는다. 1년에 몇십만원 수준? 그런데, 여기는 학제가 최소한 5년 이상이다. 5년 이상 고생스런 타향살이에 생활비까지 하면 이도 미국유학 못지 않게 험난한 길이다.
일단 그렇게 독한 각오로 외국으로 가면 이를 악물고 공부를 하여 무사히 학위를 취득한다. 그러나 그 후 국내에 들어오게 되면 경제적 현실이 달라지는가? 유학을 안 간 것 보다는 낫다. 연봉 2000 대 초중반.. 이제야 일반적인 샐러리맨의 대졸 초봉 즈음 된다. 그 동안 투자한 돈과 시간, 노력에 대한 대가가 겨우 이정도 뿐인가? 이제는 유학파도 수도 없이 많다. 더 이상 이에 대한 희소성도 없어 학교 강사, 교수직도 얻기 힘들다. 그나마 전문대나 지방대 시간강사 직도 연줄이 있어야 구할 수 있을 정도이다.
건축에 있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현실을 피해갈 길은 없다. 심지어 아무리 유명한 건축가라도 돈을 잘 벌지는 못한다. 뛰어난 작품으로 건축계에서 유명한 모 건축가도 일거리 없어 직원들 월급도 제때 못 주고 있다. 오히려 작품 활동보다는 사회적 활동과 영업활동에 활발한 일부 건축가들이 그나마 어느 정도 돈을 번다.




건축의 문제점

이러한 건축의 경제적 현실에 대한 문제는 건축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건축하는 사람들은 매우 사회 방관적이며 냉소적이다. 왜 현시대의 건축이 경제적으로 외면당하고 있는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답답한 현실이다.
이러한 문제에는 매우 고전적이고 일반적인 경제적 가치관이 기본 전제가 된다. 즉, 시간과 돈, 노력을 투자하면 그 만한 물질적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기본적 경제 관념에 건축이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input 에 대한 output 의 경제적 효용성에 대한 문제이다.
그렇다면 왜 도대체 건축은 사회적인 만족 수준에 부합하는 경제적 output을 이끌어 내지 못하는 것일까? 건축이란 학문이 추구하는 가치관에는 돈을 위한 논리가 없다. 물론, 어느 분야에서든지 ‘학문’과 현실에서의 ‘일’에서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건축의 경우 이러한 차이가 다른 어떠한 분야보다도 매우 크다.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건축이란 것이 ‘학문’적인 시각으로는 어떠한 것이고 ‘일’로서는 어떻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건축이란 학문에 열정적으로 빠져 버리기 일쑤이다. 여기에 ‘돈’을 위한 논리는 개입할 여지가 없다. 어느 분야보다도 순수하게 학문적 열정이 넘치는 학교 생활을 보낸다. 특히나, 젊은 혈기와 도전 정신이 넘치던 시기에 건축에 푸욱 빠져버린 어린 학생들은 차후에 닥치게 될 ‘일’로서의 건축을 도외시 하며 현실보다 이상을 추구하는 분위기 속에서 공부에 몰두한다. 건축이란 ‘학문’ 자체가 현실에서의 ‘일’과 그 경계가 모호하여 학생들의 명확한 판단을 흐리게 한다.
건축은 ‘학문’적 성향과 ‘일’로서의 성격을 함께 가지고 있다. 건축에서의 ‘학문’적 성향은 학생들이 공부하면서 빠져드는 매력적인 부분이다. 아름다움(美), 인간, 공간, 문화, 역사, 사회, 철학 등 모든 매력적인 학문을 포괄하고 있는 것이 건축이다. ‘일’로서의 건축은 말 드대로 일반적인 ‘일’을 의미한다. 현 시대에서 ‘일’이란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이 되었다. 가족들을 부양하고 여가를 즐기는 기본 수단이 되며,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해 가는 것이 ‘일’로서의 ‘일’이다.
건축을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학문’으로서의 건축과 ‘일’로서의 건축의 사이에서 평생 갈등과 고민을 하면서 건축을 해 나간다. 건축의 시대적인 의미가 이렇게 이중적이고 다의적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건축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현실을 피해갈 수 없는 첫 번째 이유가 발견된다. 즉, ‘학문’적 건축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편안히 잘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디자인 하고자 한다. 건축가들은 이렇게 배워왔고, 그 길은 다르지만 누구나 마음 한 편에 그러한 자기의 철학과 개성이 담긴, 영원히 남을 건축물을 디자인하고 싶은 염원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일’로서의 건축은 대부분 ‘잘 팔리는 건물’을 원한다. 경제적인 여건에 부합하고 건축주의 자산 증대에 보탬이 될 수 있는 건물을 원한다. 안타깝게도 전자의 ‘건축가들이 원하는 건축’은 후자의 ‘잘 팔리는 건축’이 아니다. 건축가들의 화려한 논리와 아름다움에 대한 숭고한 철학은 사회와 대중에게 외면당한다. 뛰어난 고등교육을 받고 풍부한 지식을 보유한 건축가들은 이러한 현실 앞에서는 굴복하면서, 뒤에서는 ‘천박한 상업주의’라는 식으로 사회에 침을 뱉는다. 스스로 엘리트 의식에 쌓여 사회를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자신들끼리의 집단을 형성한다. 이 집단 안에서 수많은 퍼포먼스를 통해 서로를 위안하며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놓고 머리 속의 지식을 자랑한다. 단지 건축을 공부하는 어린 학생들만이 그들을 인정해주고 우러러본다. ‘그들만의 잔치’인 것이다.
현재의 ‘건축가’란 직업이 생겨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건축가는 태초부터 존재해 왔으나 현 시대에서 의미하는 ‘건축가’는 겨우 몇 십년의 역사밖에 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동양이든 서양이든 건축은 단지 귀족과 왕족들을 위한 호화로운 건물을 위한 건축이었으며, 권력의 시녀의 역할을 해 왔다. 건물도 마찬가지이다. 교회, 궁전, 기념비와 같은 것이 아니라면 건물이 아름답고 멋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일반 주거는 실용성이 우선일 뿐, ‘건축’적 요소는 매우 하위레벨의 선택 기준일 뿐이었다. 건축가가 일반 주택을 설계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역사 속에서 일반 대중들은 단지 실용적이고 평범한 집만 있으면 된다.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정원을 꾸미듯 집을 꾸며가는 것이 전부일 뿐이다.
대중의 건축물들은 단지 그 시대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에 지배를 받았다. 그 시대의 세계관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공간을 구성하고 구체적인 것은 스스로 만들어갈 뿐이다. 몇몇 안 되는 건축가는 귀족과 왕족의 건물을 화려한 장식으로 멋있게 치장하는 게 본업이었다.
대중적 건축의 시대, 지역에 따른 차이는 그 사회의 패러다임과 문화수준, 그리고 전체를 조율하던 행정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었다. 교회, 궁정 등을 만드는 극소수의 건축가들만이 진짜 ‘건축가’였다. 그들은 특출난 예술적 재능을 지닌 사람들 중 선발되었으며, 오랜 기간동안 도제식 교육을 받아 상류층에 인정 받음으로써, ‘특권층’을 형성하였다. 건축가라는 사회적 지위와 인식은 특별했으며, 사회의 존경받는 전문가였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바뀌었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의 도래는 대중과 자본의 입김에 힘을 불어 넣어 주었다. 예전처럼 건축가를 뒷받혀주고 인정해주던 집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꾸준히 자신들을 지원해줄 곳도 없고 일거리도 사라져 버렸다. 건축가들은 이제 대중과 자본에 기대어야 했다. 급속한 인구증가와 엄청난 산업 개발은 건축가들을 대량생산해냈다. 건축가들이 대학에서 대량으로 양산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여년도 되지 않는다. 엄청나게 머릿수가 불어난 건축가들은 새로운 도시와 사회를 개발해내는 일꾼들이 되었다. 싼 값에 대중들을 위한 집단 주거를 찍어내고 자본가들을 위해 화려한 궁전도 선사했다. 자본주의의 세계관속에서,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다 싸게 많이 만들어 내야 했다.
그러면서, 역사 속에 파묻힌 건축에 대한 잔재는 건축가에게도, 대중에게도 남아있다. 건축에 대해 생각하면, 건축가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도 건축을 막연히 ‘예술’이란 이름으로 포장해서 떠올리고 있고, ‘건축’의 사회적인 지위와 의미도 매우 혼란스러움 속에 남아있다. 과거의 거대한 역사적 유물은 건축을 옛날의 대단했던 ‘건축’으로 착각하게 만들곤 한다. 일반인들은 아직도 건축가라고 하면, 과거의 건축가에 대한 느낌을 가지고 특출나고 대단한 직업으로 보곤 한다. 건축가들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한 때 산업의 성장기를 거치면서 저급 건축가들을 대량 양산해 내었던 우리나라는, 현재 건축가들이 포화상태이며 공급과잉 상태이다. 또한 한 때 대량 생산해내기 위해 건축가가 되기 위한 학제도 저급한 수준이며, 건축경기의 장기 침체 속에서 바글거리는 건축가들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건축 설계비는 더욱 하락되고 일거리는 더욱 찾기 어려워지고 있다.

‘일’로서의 건축과 ‘학문’으로서의 건축에서 차이가 나는 다른 이유는 ‘디자인’의 몰락이라고 말하고 싶다. 건축은 하나의 ‘디자인’으로 보여지고 있다. 일반인들에게 건축이 ‘가치’나 ‘철학’, 혹은 ‘기술’이라는 건축가의 주장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건축이 현실과의 거리에서 차이가 나는 이유는 이 시대에서 건축의 ‘디자인’이 ‘순수 예술’의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고흐는 자신의 그림이 사회나 비평가에게 인정 받지 못하면서도 이에 관계없이 그림을 그렸다. 순수 예술을 하기에 자신이 추구하는 신념 외에는 믿지 않았다. 그리고서 그가 죽은 후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보며 그의 세계를 이해했다.
이러한 것은 순수예술의 세계에서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디자인은 그렇지 못하다. 디자인은 팔려야 한다. 어떤 측면에서 디자인은 예술이라 할 수 없다. 디자인은 대중이 원해야만 존재가치가 있다. 따라서 시대의 유행과 사회의 시장성을 따라가야 한다.
디자인은 다른 무엇보다도 노동 집약적인 일이다. 현 시대의 패러다임 하에 디자인은 값비싼 경제적 가치를 얻어낼 수 없다. 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디자인이 잘 된 물건이 비싼 값에 팔리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를 디자인 하기 위한 들인 노동과 시간 등 경제적 효용성에 비추어 본다면 분명 제대로 된 값어치를 인정 받는 경우는 드물다. 간혹 유명한 디자이너가 커다란 경제적 성과를 거두어 들이는 경우도 그의 디자인 능력이 아닌 영업활동 등 사회적 능력에 기인한다.
디자인은 그 자체가 상업적이고 사치적인 성격을 갖는다. 극단적으로 못 먹고 못 사는데 디자인은 불필요하다. 물론, 디자인이 대중화되면서 문화의 수준이 올라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디자인은 더욱 더 경제적 가치를 얻기 힘들다. 디자인의 공급이 포화상태가 되고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 대중화 되면서 디자인의 가치는 하락되고 더욱 더 노동집약적이 되어 갔다.
예전에는 손으로 하루 종일 어떤 1개의 상품을 디자인 했으나 지금은 컴퓨터 등 기술을 이용해 그 상품 5~6개를 디자인한다. 그러나 우습게도 수입은 5~6배가 되지 않았고 치열한 경쟁으로 노동량은 오히려 더 늘었다. 상품의 가격이 1/5~1/6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건축은 그러한 디자인 상품들 중 가장 가치를 인정 받기 힘든 상품이다. 건축은 모든 디자인 상품들 중 실제로 만들기 위해 가장 많은 돈이 들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인정 받지 않으면 존재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설계는 건물을 짓기 전에, 즉 상품을 만들기 전에 보여주는 가상의 디자인이다. 그 건물을 지을 돈을 가진 주인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디자인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어떠한 디자인 상품보다 디자이너가 제약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다. 디자이너의 의도는 소극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 디자인의 아주 일부만이라도 햇빛을 보게 하기 위해서는..
또한 건축에서는 다른 어떠한 디자인 상품보다 예술적 가치가 최소화 되고 만다. 건축은 디자인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다. 단지 엔지니어의 기술과 법률적 지식만으로도 건축물은 얼마든지 경제적으로 지어질 수 있다. 건축가의 깊고 방대한 지식과 식견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건축가의 의도와 오만한 고집은 건축주의 돈을 쓸데없는 곳에다가 쓰게 할 수 있다. 건축가의 디자인은 건축주의 건물에 다는 액세서리에 불과하다.
건물의 가격에 건축가의 디자인은 영향력이 없다. 단지 그 건물이 위치한 땅값이 부동산 가격의 전부일 뿐이다. 이것이 건축 디자인의 현실이며 건축을 하는 사람들의 ‘학문’적인 건축과 ‘일’로서의 건축의 크나큰 격차인 것이다.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이상, 건축에 대한 짧은 소견을 적어보았다. 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실적인 경제적 가치관이 기본이 되는 건축 외부의 세계에서 ‘건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 동안 생각해 왔던 건축에 대한 단상을 종합한 것이다.
건축을 공부하면서, 일하면서 건축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건축을 그만두고 있다. 많은 경우 건축을 계속해나가는 경우와 건축을 그만두는 경우 사람들의 생각에 있어서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도 나지 않는다. 건축을 계속 하든, 안 하든 비슷한 고민과 갈등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현실에서의 건축에서 회의를 느끼고 고민하게 되는 건축인 들이 술자리에서 만나면 그들의 얘기는 밤을 새도 끝나지 않는다.
집에 돈이 있으면 건축을 하라는 말이 있다. 집에 돈이 없으면 돈 많은 아내를 만나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건축이란 일을 해나가는 데 현실적인 어려움은 피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어려움에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꿈을 위해 어려운 환경에서도 학생 때와 같이 정열을 갖고 해나가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도 적당히 현실과 타협을 해 나가면서 가능한 한 자기의 신념을 지키리 위해 남들보다 노력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하여 이름도 널리 알리고 유명해질 수도 있다.
그가 그럼으로써 얻은 가장 큰 보상은 자기 자신의 일에 대한 ‘만족감’일 것이다. 그에 따라 돈과 명예가 따라오지는 않는다. 행복한 가정과 안락한 생활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만큼 건축에서 ‘꿈’을 위한 길은 험난하고 가혹하다. 꿈은 이루어질 수 있으나 현실에서의 성공은 보장해주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현실적인 행복’은 ‘건축가로서의 성공’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하는 어린 학생들이 건축이란 ‘학문’에 빠져드는 것을 보면 우려가 된다. 그들이 밤새서 젊은 시절의 정열을 쏟아 부으며 사랑하는 ‘건축’이, 몇 년이 지난 후 그들에게 더 큰 실망감과 좌절을 가져올 지 모르기에 그 안타까움을 참을 수가 없다.
한편, 건축을 해도 ‘일’로서의 집 장사 건축을 해 나갈 수 있다. 개인의 사회적인 능력과 사업적 능력으로 꽤 큰 돈을 벌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건축가로서 추구하는 ‘건축’에의 자아성취는 잃게 될 가능성이 크다.
건축을 공부하고 사랑하는 이들이여, 보다 멀리 크게 보고 자신의 길을 개척해가기 바란다. 자신이 건축을 할 지 안 할 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문제이다. 무엇(what)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how)의 문제이다. 적성에 맞고 흥미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이 어떻게 해나가며 살아갈지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찾는 것이 어린 학생들이 우선적으로 생각해야할 일이라 권하고 싶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사람의 성격에 따라 삶의 방식이 분명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삶의 방식에서 현실적인 것과 이상적인 것을 모두 성취하고자 한다. 여기서 자신이 어떠한 삶을 원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알기 위해서 가능한 한 많은 경험과 생각을 가져보기를 권하고 싶다.
끝으로,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와 역할을 깨닫지 못하고 이 시대의 건축계가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수많은 건축인들과 이 사회에, 그 도의적 책임을 묻고자 한다.

- 건축을 사랑했던 선배가.


출처 : 어느 건축포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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