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홍
서울시립대 교수·건축학이것만 보면 토종 변방 건축가의 인간 승리다. 그러나 수상의 이면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심사위원단에 미국에서 교수와 건축가로 활동하고 있는 창융허(張永和)가 있다. 그는 왕수와 같은 난징공학원 출신이다. 자신보다 무명인 후배 건축가를 어떻게 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문화적 영웅 역시 혼자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1979년 상이 제정된 이후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수상자(4명)를 배출한 일본 역시 처음부터 심사위원단에 들어가 있었다. 일본에서 한국을 건너뛰고 중국으로 넘어간 셈이다. 왜 한국은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하나. 한국 건축계의 위상은 어느 정도인가.
외국의 민간단체가 만든 상이기에 거기에 연연하기보다 한 사회의 건축문화 지표로 참고만 하자는 것이 평소 생각이었지만, 막상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난감해진다. 만약 프리츠커상을 ‘국력을 바탕으로 국제무대에서 벌어지는 고도의 문화정치 산물’로 본다면, 그래서 각종 국제행사를 유치했던 노력을 건축계에도 쏟는다면, 한국도 가까운 미래에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을 받기 위해 건축가들이 일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이 노벨상을 받기 위해 연구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상은 부산물이지 목적이 될 수 없다. 급조한 정부의 건축문화 진흥책, 소수의 돈 많은 딜레탕트, 그리고 엘리트 건축가의 힘만으로 건축문화의 꽃을 피울 수는 없다. 들판에 무수히 핀 야생화 틈에서 눈부신 꽃이 나오는 것처럼 건축계도 저변이 튼튼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총 670만 채의 건물이 있는데 4층 이하가 96%다. 서울은 89%를 차지한다. 이것이 우리 도시를 구성하는 가장 보편적인 건축이다. 그런데 대로변 뒤쪽 길모퉁이에 면하면서 승강기가 없는 중층 중밀도의 ‘중간건축’은 도시의 질을 떨어뜨리는 문제의 건축으로 간주돼 왔다. 사실 중간건축은 대형 건설사나 이름 있는 건축가들이 손대지 않는 ‘집장사’들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석유 공급량의 감소에 따른 도시집약화,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가구 구조의 변화, 기존 건축물의 재생 등으로 건설산업이 전환되면 중간건축은 도시 건축의 강력한 대안으로 떠오를 것이다. 서민과 중산층이 함께 살며, 일하며, 소비하는 중간지대 중간건축의 질이 좋아지면 삶과 문화도 풍성해진다. 남에게 보여주기보다 내가 살고 싶은 건축이 돼야 한다. 이때 프리츠커상과 같은 부산물은 자연스레 우리에게 찾아올 것이다.
왕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닝보(寧波) 역사박물관은 대나무 거푸집으로 만든 콘크리트, 재활용 벽돌과 기와로 감싸져 있다. 평범해서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것에서 왕수는 새로운 것을 찾아낸 것이다. 심사위원장은 이런 강평을 했다. “왕수는 중국 도시가 직면한 논란을 뛰어넘어 지역성에 뿌리를 두면서도 세계적인 것을 보여주었다.” 왕수의 작품이 무분별한 파괴와 개발에 경종을 울리기를 바라는 것처럼 들린다. 우리에게도 와닿는 메시지다. 한국 건축의 혁신은 가장 보편적인 것을 딛고 나올 것이다. 중간건축을 되돌아볼 때다.
김성홍 서울시립대 교수·건축학